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주 공방전 (문단 편집) === 나주 정벌이 가능했던 이유 === 이러한 [[월경지]] 정복을 이룰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는, 왕건의 출중한 능력 이외에도 여타 역사적인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후백제]]는 나주를 중심으로 한 서남해를 기반으로 코 앞인 무주(광주)를 점령해 세워진 나라인데 이후 도읍이 완산주로 옮겨가면서 중심지에서 멀어진 나주 호족들의 박탈감이 심해졌다. 또한 전남 동부 호족(순천의 박영규와 김총, 광주의 지훤 등으로 일부는 견훤과 인척이 된다.)들과 이해관계가 더 가까운 견훤에 반감을 가졌을 가능성도 있다.[* 다만 이 대목에서 영산강 유역 호족이 고대부터 일본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는데 견훤이 해적을 일본으로 보냈다 운운은 잘못된 해석이다. 오히려 후백제 같이 강력한 정권이 들어서면 해적질을 일삼던 부류들은 중앙의 긴밀한 감시, 견제, 병력 동원을 당하기에 일본으로의 해적질 원정은 나가지 못하게 되며, 영산강 유역 호족이 커넥션이 있던 일본의 실체란 건 야마토 중앙정권이 아니라 큐슈 호족들이었기 때문이다. 영산강 일대가 자치권을 완전 박탈당한 게 이미 5세기 말 경이었고 그 이후에 행하는 교역이란 건 철저히 백제 왕실의 감독과 이득을 위해 이뤄졌기에 영산강 일대가 일본과 다른 어떤 국가적 친밀도가 있었을 개연성은 거의 없다. 10세기 일본이 후백제를 돕지 않은 건 일본 천황 가문의 상황이 몹시 어려워 한가하게 후백제를 도울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학계 일각에서는 [[태조(고려)|왕건]]의 집안이 경기만 일대의 [[고구려|고구려계]] 해양 호족인 점으로 볼 때 영산강 일대 해양 호족과 연관이 있었을 것으로 보고있다.[[https://news.v.daum.net/v/20200628082802600|#]] 당시 서남해 일대는 동아시아 문물교류의 중심지인 청해진의 근거지일 정도로 해상세력이 융성했던 지역이다. 이후에도 왕건은 2대 [[혜종(고려)|혜종]]을 낳은 장화왕후의 고장인 나주에 특별기구인 나주도대행대를 설치하고 시중(국무총리급)을 파견할 정도로 중시했으며, [[현종(고려)|현종]]은 개경과 서경에서만 행하던 국제행사인 [[팔관회]]를 나주에서도 개최하게 하였다.[[https://news.v.daum.net/v/20171109030824873|#]] 역사적으로 보면 신라, 백제, 고구려 삼국의 대결 구도가 확립되기 이전 목지국이 마한의 맹주였을 시절부터 진행되던 전남 서부 VS 전남 동부 & 남해안과의 대립과 갈등 양상이 정확히 재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래도 원삼국-삼국 시대의 대립은 백제의 협박과 회유를 통해 해소되었지만, 후삼국 시기에 이르러 견훤과 왕건을 끌어들인 군사적 대립으로 촉발된 것이다.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 호남 지역이 6세기 중엽까지도 백제의 통치력이 닿지 않는, 독자세력으로 존재했다는 인식인데 이는 내막을 보면 꽤나 잘못된 인식이다.[* 사실 이런 주장은 21세기 들어 전남쪽 지자체에서 은근슬쩍 내세우는 경우가 있다. 지자체들이 옛 왕조를 내세워 현 시대에 자기 지역이 가진 권위를 강조하고, 행정구역 재편이나 사업 유치 등에 이익을 도모하는 일은 20세기부터 흔했고, 21세기 들어 향토사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더해졌다. 역사학자들은 옛 역사를 지금 기준으로 판단하면 안된다고 이야기하지만, 정치인과 대중들은 지금 지도 보면서 이야기하기 마련이다. 하여튼 그런 상황에서 경주는 천년 내내 신라 수도라서 이의 제기할 구석도 없고, 가야 제국들이 위치한 곳은 [[금관국]](김해), [[반파국]](고령), [[다라국]](합천), [[안라국]](함안), [[고자국]](고성) 등 각 구성국 소재지에서 부각시키며 역사상의 권위와 지역 부흥 컨텐츠를 확보하고자 한다. 고구려, 고려는 수도가 이북에 있어 논외. 문제는 백제인데 최초 중심지였던 서울은 중세~근대 조선 500년 도읍으로서 가지는 위상이 워낙 커 고대 백제 [[위례성]]의 그것을 압도하기 때문에 대중들은 한성백제가 있었다는 것조차 모르는 경우도 상당할 정도로 큰 관심이 없다. 결국 충청과 전라의 대결인데 20세기에는 전라도=백제라는 인식이 강했으나 후기 백제 수도 2곳(공주, 부여)이 모두 충청도에 위치해 있는데다(정확하겐 충남--충북 지못미--) 무령왕릉 등 백제의 기억을 강조할 유적, 유물이 풍부한 충청도가 공주-부여를 내세워 2010년대 이후 백제 종주권에서 앞서가기 시작했다. 전북 또한 아쉬울건 없는게 백제로 따져도 백제 제2수도 기능을 한 [[국립익산박물관|익산]]이나 [[견훤]]이 전주를 후백제의 도읍으로 삼은 점을 강조해 충청도에 비벼볼 여지가 있고, 그 외에도 백제를 대신할만한 역사적 상징을 이미 가지고 있다. 고고학적 성과로 고조선과도 연결되는 익산시 일대 [[건마국]]이 재조명된데다, 특히 한국에서 2번째로 많은 성씨이자 [[조선]]의 국성이었던 [[전주 이씨]]의 본향이기 때문이다. 전주에서 가장 자신있게 내세우는 관광지 역시 후백제 유적이 아니라 조선 가옥을 재현한 [[전주한옥마을]]이고, 이런 전주한옥마을에 정통성을 더해주는 건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봉안한 [[경기전]]이다. 전주의 역사문화벨트도 경기전 중심으로 묶여있다. 허나 전남은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백제 상실을 극복하기 위해선 백제를 대신할, 백제보다 더 오래된 권위를 발굴해야 했고 그게 [[마한]]이란 것. 2010년대 마한 문화제 등을 개최하다가 2020년 5월 국회 통과한 역사문화특별법에 영산강 유역을 마한역사문화권으로 포함시켜 나주시 중심으로 대대적인 발굴사업과 학술조사에 들어갔다.] 우선 백제는 한번도 마한과 별개로 존속한 적이 없았다. 마한이 하나의 국가도 아니고, 백제가 마한을 멸망시킨 것도 아니다. 전기 마한을 주도했던 목지국이 멸망하고 마한의 한 소국으로 시작한 백제가 후기 마한의 영도국이 되었을 뿐이다.[* 외국 역사로 따지면 목지국에 에트루리아, 백제에 로마, 마한에 라틴 연합 내지는 라틴ㆍ이탈리아계 도시국가들을 대입하면 얼추 맞아떨어진다. 로마가 라틴 연합과 국가 대 국가로 맞서싸운 적이 없었고, 유이민과 토착민이 융합하여 반도의 중부 요지에 자리잡고 나서는 그 일대의 기존 맹주에 일단은 숙이고 지내다가 힘을 길러 마침내 타도하고 새로운 맹주가 되어 영향권을 넓히다가 마침내 영토국가가 된 것.] 호남 역시 삼국 통일 이전까지 단일 세력권이 자리잡은 적이 없었고, 늘 별개의 고고학적 세력이 서로 견제하며 존재했음을 모르는 나머지 생긴 편견이다. 따라서 호남 전체가 백제와 마한으로서 늘 항쟁했다는 건 심각하게 잘못 알려진 설이다.[* 일본서기 신공기(神功紀) 신공(神功)49年, 왜가 한반도를 정벌했다는 기록에서 물론 기록의 진위 여부에 대한 논란이 크고, 신공황후(神功皇后) 실존 여부 자체가 논란이므로 신공49년에 대한 시기도 의문이지만 아무튼 여기서 왜가 침미다례를 도륙하고 백제에게 주었다는 기록에서 비록 추측이기는 하지만 신공(神功)49년을 서기369년으로 해석하고, 왜를 백제로 바꾸어 해석해서 서기369년 백제왕이면 즉 근초고왕이 전라남도 해남에 비정되는 침미다례를 '도륙' 했다는 묘사는, 여전히 백제의 주도적 위치에 동의하지 않는 영산강 유역 세력의 주도 소국을 무력으로 완전 해체한 것으로 풀이된다. 실제로 그 시기에 해남 신월리에서 번영하던 마한 소국이 갑자기 증발하는 걸로 나타난다. 실제로 고고학적으로도 4세기 중후반 경부터 영산강 유역에서 어떤 주도적인 세력이 문화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주도한 바 없이 백제의 일정한 견제를 받아 성장이 저해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한성 함락 이후에야 이 속박이 약간 풀리지만 오래가진 못했다.] 다만 마한 지역이 넓고, 백제가 고구려와도 쟁패해야 했으니 통합이 늦어지다 직접 지배로 편재해서 지배한 게 전남 동부 및 남해안은 150년 정도, 전남 서부는 120년인데, 직접 지배 시기만 영역이었다고 해석하는 건 말이 안 되는 얘기인데다 직접 지배 시기도 120~150년이면 결코 짧지 않다. 이 지역은 [[한성백제]]가 처참하게 무너진 시기에 잠깐 다른 길을 찾아보면서 신라, 가야, 왜 등과 제휴했지만 이런 외도는 불과 20~30년을 넘기지 못했고 그동안에도 백제에게 군사적 도전이나 대결을 시도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같은 시기에 가야는 거꾸로 백제와 더욱 밀접한 관계를 맺으려 하면서 신라를 견제했으니, 애초에 영산강 세력의 외도는 성공할리가 없었다. 직접 지배 영역으로 편제된 것도 어디까지나 백제와의 적절한 타협과 회유로 이루어져서[* 5세기 말~6세기 초부터 이 지역 분묘는 그 규모가 크게 줄긴 했어도, 직접 지배로 편제되었다고 추정되는 시기 즈음부터 오히려 백제 중앙 조정에서 하사한 위신재가 더욱 많이 발굴되는 상황이다. 여기서 발견되는 금동관은 백제가 영산강 유역 세력과 수직적 관계가 아니라는 강력한 반증이 아니다. 주로 강력한 직접 지배 관계 관철이나, 금동관까진 줄 필요가 없는 군소 세력에게 주는 위신재로 드러나는 칼이 아니라고 해서 수직적 관계가 아니라는 해석은 근거가 없다. 물론 칼에 비해선 해당 세력의 수장이 세력이 만만찮아 다소 협력 관계가 두드러질 수 있다고 쳐도 적어도 한반도 내에서 발견되는 금동관은 큐슈나 진한 일대 같은 무역로상 호족들에게 주는 선물과는 해석이 달라질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위신재 금동관이 상하 관계가 아니라는 설은 다름아닌 웅진백제의 수도가 될 정도로 백제 왕실과 관계가 깊었던 공주 수촌리 세력이 한성백제 시절에도 금동관을 사여받은 사실, 그리고 백제국이 마한의 원수장국이었던 익산 건마국을 해체하기 위해 준왕 계열의 잔여 세력인 입점리, 웅포리 세력들에게 금동관을 사여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이제는 논파된 지 오래인 설이다.][* 금동관 하사는 백제와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는 증거일 뿐 그것이 곧 영산강 세력의 독자성을 뜻하진 않는다. 그렇게 독자성이 강했다면 영산강 세력이 적어도 전남 동부 진출에서 가야보다도 심한 제약을 백제에게 당하게 되는 견제가 전혀 설명되지 않는다. 백제와의 관계에 따라 널을 뛰면서 백제와 척을 지면 어김없이 쇠락을 면치 못했던 침미다례 주도 세력들(해남 군곡리, 해남 신월리, 영암 시종면, 나주 반남면, 나주 복암리)의 부침도 마찬가지다. 영산강 유역에서 발굴되는 금동관들은 백제 금동관과 제작기법이나 형식면에서 차이가 커서 하사품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들도 있으나, 이는 한성 공함 직후 예외적인 상황을 반영함에 불과하다.], 그 시대 이후로도 전남 서부는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크게 퇴락한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런 모습은 통합 과정에서 예전의 부하 나라 백제국에게 격렬히 저항한 천안 [[목지국]] 세력이 백제의 적극적 견제를 받아 크게 쇠락해버린 것과 비교하면, 대단히 의미가 큰 차이였다. 일반적인 편견과는 달리 오히려 주로 충청도 동부에서 백제에게 저항하다 그 주도력을 잃어버린 채 백제에 의한 인위적인 세력 개편이 의심되는 양상이 고고학적으로 꽤 관찰되는 양상이다. 목지국의 저항이 생각보다 만만찮았던 반증이다. 반면 영산강 일대는 근초고왕 시기로 추정되는 때에 영산강에서 가장 강했던 소국이 완전 해체되어 타멸되어버린 후론 그런 모습이 거의 관찰되지 않는다. 그러다 삼국 통일 이후에 이러한 구도에 큰 변화가 생기는데, 통일신라가 전남 동부와 남해안에 의도적으로 원신라인들을 대거 사민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백제가 영산강 유역 세력을 제압하기 위해 키운 거점인 무진주, 호남 동부 내륙 세력이 크게 힘을 얻게 되었다. 이들 호남 동부 세력은 영산강 세력과 대립 관계에 들어가 후삼국 시기까지 이어진다. 그런 상황에서 호남 동부를 중심으로 백제를 재건하겠다는 신라 군인 견훤의 주장이 영산강 세력에게 전혀 먹히지 않은 건 당연했다. 후기 백제의 중심지였던 충청도와 후기 백제의 제2수도권이었던 전주-익산 지역이 견훤의 손을 들어주고 지지를 보낸 점을 감안하면 견훤의 명분 자체가 약했던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쉽게 되지도 않았다. 견훤의 거병 시기에 대한 학설은 889년과 892년으로 나뉘는데 삼국사절요, 징효대사탑비 등의 기록을 종합해보면 889년 내지는 892년에 거병한 견훤이 전남과 전북을 아우르고 전주에 입성한건 900년이 되어서였다.] 호남 동부와 오랜 대립관계였던 영산강 세력이 보기엔 전혀 매력이 없었던 건 사실이었다. 그런 와중이었으니 영산강 세력은 마진-태봉-고려의 해상 세력과 제휴하는 게 훨씬 이득이었다. 더군다나 서해안 지역, 특히 전남 해안 일대는 과거 청해진이 위치할 정도로 동아시아 물류의 거점으로도 통했는데 이들이 쥐고 있는 막강한 경제력을 감안하면 제휴하면 했지 굳이 누구를 왕으로 모실 필요성이 없었을 수 있다. 이점은 929년 견훤이 나주를 탈환한 뒤에 보여준 태도에서도 엿보이는데 그는 매곡성주 공직이 투항하자 공직의 아들딸을 붙잡아 불구로 만드는 등 투항자를 너그럽게 용서하는 성격이 결코 아니었음에도 오다련, 최흔 등 왕건에 협력한 지방세력의 잔당에 해코지한 정황은 없다. 후삼국 시대 지방세력들의 잦은 줄타기를 감안하더라도 견훤과 이들 사이에 수직적 주종관계가 형성되어 있었을 가능성은 낮다. 이처럼 나주공방전은 원삼국시대부터 내려온 온갖 정치공학적 방정식이 응집된 매우 중요한 사건이라 볼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